꽤 괜찮은 해피엔딩
전체적인 느낌
꽤 여러 이야기를 자세히 이야기를 하며 나긋하게 풀어간다. 꽤나 자세히 이야기를 서술하여 후반에는 정말 몰입하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읽게 되었다. 읽을 때는 무거운 느낌이 없고 오히려 가볍게 읽었는데 읽고 생각해보니 참 어려운 이야기를 덤덤하면서도 쉽게 풀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무겁기도하며 새로운 관점을 배우기도 하고 삶의 태도를 배우기도한 책이였다.
인상 깊은 문장
그래도 그 와중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상처 입은 우리가 회복하는 동안 마음속 어떤 부분은 키가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성숙하며 전에 갖지 못한 관점을 갖게 되기도 한다.
p.19
잘 알려진 이야기인 인간은 척추 동물이지만 마음은 갑각류와 같다는 것이 떠올랐다. 상처에 가장 취약할 때 가장 약할때 제한 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트라우마로 생각될 일은 겪지 않았지만 성장의 순간을 떠올리면 많은 경우가 안 좋은 일들과 연관이 되어있다.
즉 지치고 힘들 때 오히려 성장하고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였다.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p.20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기에는 참 어렵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에는 이 정의가 좋을 듯 싶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보다 내가 어떤 삶을 꿈꾸고 바라보고 살아가는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꿈을 꾼다는 것은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그 삶을 목표로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듯 미래의 삶을 그리며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읽고 잠시 미래의 삶을 생각해보았을 때 사람들과 잘 지내고 많은 도움을 받고 많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성장할게 훨씬 많지만 더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성장하고 나누면 좋겠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도 대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말해 주지도 않았다. 아니, 교수님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이해받고 나니 신기하게도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다시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다.
p.115-116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멋진 조언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도 좋지만 이야기를 잘 듣고 경청해주기만해도 스스로 힘을 찾을 수 있다. 괜히 예수님이 사람들과 식사를 많이 하신게 아니다. 당시 어울리기를 꺼려했던 사람들과 밥을 먹으며 빈축을 샀는데 추측컨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시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도 힘든 사람이 있을 때 여러 고민말고 밥 먹자고 연락하고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조금 더 확대 해석을 해보자면, 그날 마라톤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상징했다. 약한 사람 한 명을 위해 그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 이웃, 민간 단체와 전문가, 그리고 언론과 정부가 함께한다면 인생이란 마라톤도 훨씬 더 수월하게 완주할 수 있음을 배웠다.
p.195
이 이야기는 이지선 교수가 마라톤을 할 때 옆에서 함께 달려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 호모사피엔스는 당시 다른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을 누르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생했기 때문이다. 캐스퍼리 교수와 이상희 교수가 2004년 7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에 게재한 “할아버지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논문에 따르면 당시에는 30세 이상이면 고령인구인데 네안데르탈인은 청년 10명 당 고령인구가 4명에 불과한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청년 10명당 고령인구가 2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오며 얻은 지식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고 더 많은 지식을 통해 풍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장수하며 지식 뿐만 아니라 문화가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공생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가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 시대에는 공생을 하고 있는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 없으면 당연히 뒤쳐지고 살아남지 못하는게 당연시 된다. 또한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소극적이다. 전장연이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할 때 부정적 여론이 훨씬 많다. 일부 공감하는 것은 시위를 통해 불편을 끼치고 과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위를 비판하지만 그들의 아픔과 불편함을 생각하거나 알아볼려고 시도는 했는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하는데 지상 버스를 타기 위해 몇 대를 보내며 기다렸지만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고장났다며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각자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공생하는 삶이 되기를 꿈을 꿔본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제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비극적 낙관주의 Tragic Optimism 를 설명하며 불행에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불행으로부터 좋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p.239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 자체는 바꿀 수 없는 현실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할 것인가는 스스로의 몫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이것을 읽고 떠올린 생각은 입사에 실패했을 때이다. 꽤 어려번 받아봤는데 매번 쓴 맛이지만 오히려 더 내가 성장해서 복수한다라는 생각으로 바꾸어 받아들였다. 나름 그 덕에 성장도 했다. 이처럼 불행한 것은 사실이나 좋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참고 기사 할아버지 덕분에 인류 살아남았다